하시모토 치카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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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하시모토 치카라는 일본의 전 야구 선수이자 배우이다. 1953년 프로 야구 선수로 데뷔하여 1950년대 후반까지 활동했으며, 이후 배우로 전향하여 1960년부터 1986년까지 다양한 영화에 출연했다. 특히, 《대마신》 시리즈에서 대마신 역을 맡아 인지도를 높였으며, 이소룡 주연의 《정무문》에도 출연했다. 그는 1986년 《복성》을 마지막으로 배우 활동을 마쳤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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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시모토 치카라 - [인물]에 관한 문서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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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본 정보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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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명 | 하시모토 치카라 |
다른 이름 | 하시모토 리키 |
출생일 | 1933년 10월 20일 |
사망일 | 2017년 10월 11일 |
출생지 | 홋카이도, 일본 |
사망지 | 일본 |
신장 | 176 cm |
체중 | 74 kg |
선수 정보 | |
포지션 | 외야수 |
투구/타석 방향 | 우투/우타 |
프로 입단 정보 | |
프로 입단 년도 | 1953년 |
드래프트 순위 | 해당사항 없음 |
데뷔 | 1953년 |
최종 경기 | 1958년 |
선수 경력 | |
선수팀 | 마이니치 오리온스 (1953-1959) 마이니치 오리온스 다이마이 오리온스 (1953 - 1959) |
출연 작품 정보 | |
직업 | 배우 |
활동 기간 | 1959년 - 1985년 |
장르 | 영화 |
소속사 | OK 엔터테인먼트 |
대표작 | 대마신 시리즈 (슈트 액터) 정무문 (악역) |
학력 | |
최종 학력 | 홋카이도 하코다테 서고등학교 |
2. 야구 선수 경력
하코다테 니시 고등학교 3학년이던 1952년, 제24회 선발 고등학교 야구 대회에 출전했으나 첫 경기에서 대회 우승교인 시즈오카 상업고등학교에 1-0으로 패했다. 같은 해 제34회 전국 고등학교 야구 선수권 대회에도 출전하여 8강까지 진출했으나, 나리타 고교에 연장 15회 접전 끝에 4-1로 패배했다.
고교 졸업 후 1953년, 본래 프로 야구 국철 스왈로스에 입단할 예정이었으나, 은인이자 존경하던 누마자와 코이치로의 권유로 마이니치 오리온스에 입단했다. 1957년에는 외야수 주전 자리를 확보했으나, 그해 말 구단이 다이에이 유니온스와 합병하여 "다이마이 오리온스"로 변경되었다. 1958년에는 오사카 타이거스에서 강타자 타미야 켄지로가 이적해 오면서 외야수로서의 입지를 잃게 되었다.
1959년 부상으로 2군으로 내려갔다. 이 시기에 구단 모회사인 다이에이가 제작하는 영화 《잇토사이 넘버 6》에 어드바이저 겸 선수 역할로 출연하게 되었는데, 이는 실질적인 배우 데뷔가 되었다. 그러나 영화 촬영 중 외야에서 다이빙 캐치를 연기하다가 쇄골이 부러지는 큰 부상을 당했고, 결국 그해 시즌 종료 후 자유 계약 선수로 풀려나 현역에서 은퇴했으며, 이를 계기로 다이에이 측의 권유를 받아 배우로 전향하게 된다.
2. 1. 프로 선수 시절
야구 선수에서 영화 배우로 전향했지만, 당시 야마모토 후지코, 쿄 마치코, 와카오 아야코 등이 전성기를 누리고 있어 "그런 사람들과 함께 영화에 출연한다는 것은 생각할 수 없었다"고 한다. 하지만 우에다 키치지로에게 상담한 결과, "당신은 그 얼굴 생김새도 성격도 (배우에게) 어울린다"라는 조언을 듣고, "같은 다이에이 영화 소속이라 사택을 이사하지 않아도 된다"는 점도 고려하여 배우 전향을 결심했다고 한다. 야구 선수 시절 월급은 10만엔(연봉 120만엔)이었으나, 다이에이에서 제시한 급료는 연봉 30만엔이었다. 처음에는 "급료가 30만엔이다"라는 제시에 "월급이 30만엔이 되었나"라며 기뻐했지만, 이내 연봉임을 알고 실망했다고 한다.데뷔작에서는 카바레에서 춤추는 남녀 중 한 명인 엑스트라 역할을 맡았다. 가츠 신타로나 이치카와 라이조, 타미야 지로 등 당대의 스타들과 함께 연기했으며, 이들에 대해 "각각 완전히 한 나라의 주인이니까, 예를 들면 오다 노부나가, 도쿠가와 이에야스, 도요토미 히데요시 같은 각기 다른 타입의 영웅들"이라고 평가했다. 영화에서 베이는 역할을 자주 맡았지만, 검술은 특별히 배우지 않고 다른 배우들의 연기를 보고 흉내 내며 익혔다고 한다.
배우를 은퇴하게 된 계기로는 "나를 키워준 나가타 마사이치 씨가 돌아가신 것이 매우 컸다"고 언급했다. 나가타에 대해서는 "결과는 좋지 않았지만, 그전까지 그 사람이 영화계나 회사에 쏟은 업적은 대단한 것이었다"고 회상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