맨위로가기

하시모토 치카라

"오늘의AI위키"는 AI 기술로 일관성 있고 체계적인 최신 지식을 제공하는 혁신 플랫폼입니다.
"오늘의AI위키"의 AI를 통해 더욱 풍부하고 폭넓은 지식 경험을 누리세요.

1. 개요

하시모토 치카라는 일본의 전 야구 선수이자 배우이다. 1953년 프로 야구 선수로 데뷔하여 1950년대 후반까지 활동했으며, 이후 배우로 전향하여 1960년부터 1986년까지 다양한 영화에 출연했다. 특히, 《대마신》 시리즈에서 대마신 역을 맡아 인지도를 높였으며, 이소룡 주연의 《정무문》에도 출연했다. 그는 1986년 《복성》을 마지막으로 배우 활동을 마쳤다.

더 읽어볼만한 페이지

  • 마이니치 오리온스 선수 - 사토 헤이시치
    사토 헤이시치는 홋카이도 출신으로 마이니치 오리온스와 한큐 브레이브스에서 투수로 활약하며 1950년 마이니치 오리온스의 퍼시픽 리그 첫 우승에 기여했고 1951년 올스타전에도 출전한 일본의 프로 야구 선수였다.
  • 마이니치 오리온스 선수 - 고 쇼세이
    고 쇼세이는 가노 야구단, 요미우리 자이언츠, 한신 타이거스, 지바 롯데 마린스에서 활약하며 '인간 기관차'라는 별명을 얻은 대만 출신 일본 프로 야구 선수로, 요미우리와 한신에서 모두 주력 선수로 활약, 2년 연속 수위 타자 및 최우수 훈장 선수 수상, 은퇴 후 사업가, 귀화 후 이시이 마사유키로 개명, 야구 명예의 전당에 헌액되었다.
  • 홋카이도 출신 - 다이호 고키
    다이호 고키는 우크라이나인 아버지와 일본인 어머니 사이에서 태어나 21세에 최연소 요코즈나에 등극, 마쿠우치 32회 우승 및 45연승 등의 압도적인 기록을 세우며 "쇼와 시대의 다이요코즈나" 칭호를 얻고 국민영예상을 추서받은 전설적인 스모 선수이다.
  • 홋카이도 출신 - 미사와 미쓰하루
    1981년 전일본 프로레슬링에서 데뷔하여 2대 타이거 마스크로 활동한 미사와 미쓰하루는 1990년부터 본명으로 챔피언에 오르고 프로레슬링 노아를 설립하여 초대 GHC 헤비급 챔피언에 오르는 등 활약했으나 2009년 경기 중 사고로 사망한 일본의 프로레슬러이다.
  • 폐암으로 죽은 사람 - 정태인
    정태인은 서울대학교에서 경제학 학위를 취득하고 참여정부에서 경제 정책에 영향을 미쳤으나 행담도 개발 사업 논란으로 물러난 후, 한미 FTA를 비판하고 진보신당 창당에 참여한 경제학자이자 대학교수, 정치인이다.
  • 폐암으로 죽은 사람 - 장택상
    장택상은 대한민국의 독립운동가이자 정치인으로, 임시정부 활동, 수도경찰청장, 초대 외무부 장관, 국무총리, 국회의원을 역임했으며, 이승만 지지 후 야당 정치인으로 반독재 투쟁을 전개했다.
하시모토 치카라 - [인물]에 관한 문서
기본 정보
치카라 하시모토 다이마진 1955 스캔10014
1955년 촬영
본명하시모토 치카라
다른 이름하시모토 리키
출생일1933년 10월 20일
사망일2017년 10월 11일
출생지홋카이도, 일본
사망지일본
신장176 cm
체중74 kg
선수 정보
포지션외야수
투구/타석 방향우투/우타
프로 입단 정보
프로 입단 년도1953년
드래프트 순위해당사항 없음
데뷔1953년
최종 경기1958년
선수 경력
선수팀마이니치 오리온스 (1953-1959)
마이니치 오리온스
다이마이 오리온스
(1953 - 1959)
출연 작품 정보
직업배우
활동 기간1959년 - 1985년
장르영화
소속사OK 엔터테인먼트
대표작대마신 시리즈 (슈트 액터)
정무문 (악역)
학력
최종 학력홋카이도 하코다테 서고등학교

2. 야구 선수 경력

하코다테 니시 고등학교 3학년이던 1952년, 제24회 선발 고등학교 야구 대회에 출전했으나 첫 경기에서 대회 우승교인 시즈오카 상업고등학교에 1-0으로 패했다. 같은 해 제34회 전국 고등학교 야구 선수권 대회에도 출전하여 8강까지 진출했으나, 나리타 고교에 연장 15회 접전 끝에 4-1로 패배했다.

고교 졸업 후 1953년, 본래 프로 야구 국철 스왈로스에 입단할 예정이었으나, 은인이자 존경하던 누마자와 코이치로의 권유로 마이니치 오리온스에 입단했다. 1957년에는 외야수 주전 자리를 확보했으나, 그해 말 구단이 다이에이 유니온스와 합병하여 "다이마이 오리온스"로 변경되었다. 1958년에는 오사카 타이거스에서 강타자 타미야 켄지로가 이적해 오면서 외야수로서의 입지를 잃게 되었다.

1959년 부상으로 2군으로 내려갔다. 이 시기에 구단 모회사인 다이에이가 제작하는 영화 《잇토사이 넘버 6》에 어드바이저 겸 선수 역할로 출연하게 되었는데, 이는 실질적인 배우 데뷔가 되었다. 그러나 영화 촬영 중 외야에서 다이빙 캐치를 연기하다가 쇄골이 부러지는 큰 부상을 당했고, 결국 그해 시즌 종료 후 자유 계약 선수로 풀려나 현역에서 은퇴했으며, 이를 계기로 다이에이 측의 권유를 받아 배우로 전향하게 된다.

2. 1. 프로 선수 시절

야구 선수에서 영화 배우로 전향했지만, 당시 야마모토 후지코, 쿄 마치코, 와카오 아야코 등이 전성기를 누리고 있어 "그런 사람들과 함께 영화에 출연한다는 것은 생각할 수 없었다"고 한다. 하지만 우에다 키치지로에게 상담한 결과, "당신은 그 얼굴 생김새도 성격도 (배우에게) 어울린다"라는 조언을 듣고, "같은 다이에이 영화 소속이라 사택을 이사하지 않아도 된다"는 점도 고려하여 배우 전향을 결심했다고 한다. 야구 선수 시절 월급은 10만(연봉 120만)이었으나, 다이에이에서 제시한 급료는 연봉 30만이었다. 처음에는 "급료가 30만이다"라는 제시에 "월급이 30만이 되었나"라며 기뻐했지만, 이내 연봉임을 알고 실망했다고 한다.

데뷔작에서는 카바레에서 춤추는 남녀 중 한 명인 엑스트라 역할을 맡았다. 가츠 신타로나 이치카와 라이조, 타미야 지로 등 당대의 스타들과 함께 연기했으며, 이들에 대해 "각각 완전히 한 나라의 주인이니까, 예를 들면 오다 노부나가, 도쿠가와 이에야스, 도요토미 히데요시 같은 각기 다른 타입의 영웅들"이라고 평가했다. 영화에서 베이는 역할을 자주 맡았지만, 검술은 특별히 배우지 않고 다른 배우들의 연기를 보고 흉내 내며 익혔다고 한다.

배우를 은퇴하게 된 계기로는 "나를 키워준 나가타 마사이치 씨가 돌아가신 것이 매우 컸다"고 언급했다. 나가타에 대해서는 "결과는 좋지 않았지만, 그전까지 그 사람이 영화계나 회사에 쏟은 업적은 대단한 것이었다"고 회상했다.

2. 2. 통산 성적 (일본 프로 야구)

다이마이1214130100010100--1--050.077.143.077.2201954175349101530224713004--0110.306.358.490.84819553220100010000000000.500.500.5001.0001956731751571935014491562201600431.223.295.312.6071957119267238295611358818179102305604.235.316.370.68619587593829132011855320701300.159.233.220.453통산: 6년29960454167121164121814530175051061495.224.298.335.632



'''등번호'''

3. 배우 경력

1959년 야구 선수 시절 부상과 영화 출연을 계기로 현역에서 은퇴한 후, 다이에이의 권유를 받아 배우로 전향했다. 1960년 1월 1일 "다이에이 뉴 페이스"로 정식 입사했으며, 동기로는 이타미 주조, 무라카미 후지오 등이 있었다. 이후 다이에이 교토 촬영소 전속 배우가 되어 주로 악역 중심의 단역을 맡았다.

1966년에는 큰 키를 살려 영화 《대마신》에서 대마신의 슈트 액터를 맡아 주목받았다. 같은 해 제작된 "대마신 시리즈" 3편 모두에서 대마신 역을 연기하며 강렬한 눈빛 연기로 호평을 받았다. 1968년에는 《요괴 대전쟁》에서 악역 요괴 '다이몬'의 슈트 액터를 맡았다.

1971년 다이에이가 도산하자, 평소 친분이 있던 카츠 신타로의 "카츠 프로덕션"으로 이적했다. 1972년에는 홍콩 영화 《정무문》에 출연하여 이소룡의 상대역인 스즈키 히로시를 연기하며 해외에도 얼굴을 알렸다. 이후 여러 영화에 조연으로 출연하며 활동을 이어갔다.

1985년, 다이에이 시절의 사장이었던 나가타 마사카즈의 사망을 계기로 배우 활동을 은퇴했다. 은퇴 후에도 "대마신 시리즈" 관련 행사나 프로그램에 게스트로 참여하는 등 간간이 모습을 보였다. 2017년 10월 11일 폐암으로 사망했다[6].

3. 1. 전향 계기

1958년, 오사카 타이거스에서 강타자 타미야 켄지로가 입단하면서 하시모토는 외야수로서 주전 자리를 잃게 되었다. 1959년에는 부상으로 2군으로 강등되었다.

이 시기에 고미 야스스케 원작의 소설 『잇토사이 넘버 6』이 구단의 모회사인 다이에이에서 스가와라 켄지 주연, 키무라 케이고 감독으로 영화화되었다. 당시 2군에 있던 하시모토는 이 영화에 어드바이저 겸 선수 역으로 출연하며 실질적인 배우 데뷔를 하게 되었다. 그러나 영화 촬영 중 외야에서 다이빙 캐치를 연기하다가 쇄골이 부러지는 부상을 당했다.

결국 이 해 시즌 종료 후 자유 계약 선수로 풀려나 현역에서 은퇴하였다. 이를 안타깝게 여긴 영화사의 조감독 나카무라 다이지로가 "배우가 되지 않겠나"라고 권유했다. 하시모토 본인에 따르면, 이 제안은 촬영소장을 거쳐 다이에이 사장 나가타 마사카즈에게 전달되어 순조롭게 배우 전향이 결정되었다고 한다.

1960년 1월 1일에 "다이에이 뉴 페이스"로 정식 입사가 발표되었으며, 동기로는 이타미 주조, 무라카미 후지오 등이 있었다. 이후 다이에이 교토 촬영소 전속 배우가 되었다.

3. 2. 주요 활동

대마신 시리즈에서 주인공 대마신 역을 맡았다. 이 시리즈의 감독인 야스다 구미, 모리 이쓰오나 특수 촬영 감독 쿠로다 요시유키 등이 야구 팬이었던 점이 캐스팅에 영향을 미쳤을 수 있다는 이야기가 있다. 하시모토 본인은 이 작품 전에 출연했던 텔레비전 시대극 《풍운아 한지로》(도쿄 12채널)에서 야스다 감독의 눈에 들었던 것 같다고 회고하며, 봉제 인형 연기에는 체력이, 대마신 역할에는 눈빛의 강렬함이 중요했다고 말했다.

《대마신》 출연 당시, 소속사로부터 "교토에서 주역을 맡으라"는 지시를 받고, 가츠 신타로나 이치카와 라이조 같은 스타 배우들을 제치고 자신이 맡을 주역이 무엇일지 반신반의하며 교토로 향했다고 한다. 현장에 도착해서야 자신이 정말 주역임을 알게 되었다고 웃으며 이야기했다.

대마신 봉제 인형은 키 2.5m, 무게 5.6kg에 달했으며, 교토의 더운 날씨 속에서 촬영은 매우 힘들었다. 특수 촬영 감독 쿠로다 요시유키는 "가짜 눈으로는 박력이 나오지 않는다"는 생각에 하시모토의 실제 눈을 가면 밖으로 보이게 했다. 이 때문에 "신이니까 눈을 깜빡이지 말아 달라"는 요구를 받았고, 고구마 가루가 날리는 촬영 현장에서도 눈을 깜빡이지 않으려 노력했다. 본인은 매우 힘들었다고 술회했지만, 눈에 힘을 주어 부릅뜬 연기는 충혈되고 번뜩이는 눈빛으로 표현되어 국내외에서 큰 호평을 받았다. 그는 "뜻밖의 행운이었다, 눈의 효과라는 것은"이라고 말했다. 이 연기로 눈이 상해서 차로 씻어 관리해야 했다고 한다.

대마신의 얼굴은 청록색이었기에, 하시모토의 눈 주위도 같은 색으로 칠해야 했다. 그는 "봉제 인형을 입고 있을 때는 괜찮지만, 벗고 쉴 때는 너구리 같은 얼굴이 되었다"고 말했으며, 미스미 겐지 감독에게 "'''너구리 아저씨, 초록 너구리'''"라고 불리기도 했다.

후속작인 《대마신 노하다》와 《대마신 역습》에서는 수중 장면 연기도 해야 했다. 마신 가면은 얼굴에 밀착되어 산소 공급 장치를 달 공간이 없어, 산소통 없이 연기해야 했다. 슈트 액터로서 위험하고 당황스러운 순간도 많았지만, 두 번째 작품부터 요령이 생겼다고 한다. 이후 《요괴 대전쟁》(1968)에서 요괴 '다이몬' 역을 맡았을 때는 스스로 아이디어를 내는 등 즐겁게 연기했다고 한다. 다이몬 역 캐스팅은 쿠로다 요시유키가 대마신에서의 강렬한 눈빛 연기를 높이 사 직접 지명하여 이루어졌다. 하시모토는 "이건 이제 장인의 일이라, 출연료 같은 건 별로 상관없고, 우리가 이걸 만들어서 만족한다는 느낌으로 했다"고 이야기했다.

《드래곤 분노의 철권》에서 이소룡과 공연하게 된 것은 가츠 신타로가 《신 좌두사 파! 당인검》(1971)에서 왕우(지미 왕)와 함께 출연한 것이 계기가 되었다. 가츠 신타로와 친해진 왕우는 골든 하베스트를 통해 가츠에게 "미국에서 온 굉장한 친구가 홍콩에서 찍은 첫 영화가 100만달러의 흥행 수입을 올렸다. 그 2탄을 만들고 싶은데, 메이지 시대의 나쁜 일본인 역을 할 배우를 소개해 달라"고 의뢰했다.

가츠 신타로는 하시모토에게 갑자기 전화해 "지금부터 마작 할 테니 3만 가지고 당장 와"라고 말했다. 하시모토는 마작 제안인 줄 알았지만 돈의 의미는 몰랐으나, 가츠의 제안이라 거절하지 못하고 찾아갔다. 가츠는 "사실 홍콩에 가줬으면 좋겠다"고 말했고, 전화로 들은 3만은 여비였다. 놀란 하시모토는 가츠 신타로의 더빙을 담당하던 가츠무라 준과 함께 홍콩으로 떠났다. 그는 광둥어도 모르고 사전 지식도 없는 상태였다고 한다.

불안한 마음으로 홍콩에 도착하니, "하시모토 치카라, 가츠무라 준 대선생 환영"이라는 깃발이 있었고, 과거 다이에이 조후 촬영소에서 영화를 배우던 조감독 출신 인물이 마중 나와 있었다. 이 사람이 체류 기간 동안 통역과 보살핌을 맡아주어 안심할 수 있었다고 한다. 이후 촬영소에서 나유 감독을 만났고, "스케일이 큰 거물이라고 생각했다"고 회상했다.

주연 배우 이소룡은 하시모토를 매우 환영해주었다. 하시모토는 이소룡에 대해 "굉장히 민첩한 느낌. 매우 쾌활하고 예의 바른 사람이었다"고 인상을 말했다. 영화 촬영은 홍콩 영화계의 관행대로 각본 없이 진행되었으며, "어쨌든 악역이다. 너는 이소룡 역할의 원수! 원수! 원수의 인간이다"라는 지시만 받았다. 대사도 통역에게 들은 내용을 바탕으로 스스로 일본어로 만들어 넣었으며, 영화의 전체 내용은 파악하지 못했다고 한다.

영화 속 일본인들이 하카마를 앞뒤 거꾸로 입고 있는 것을 하시모토가 지적했지만, 의상 담당자는 "이쪽이 더 보기 좋다"며 수정하지 않았다. 악역인 안경 쓴 유도 선생 역할의 배우는 메이지 대학 출신으로 일본어를 구사할 수 있었다고 한다.

이소룡과의 액션 장면 촬영은 비교적 순조로웠다. 하시모토 측은 가츠무라 준이 검술 안무를 짰고, 이소룡은 자신만의 액션 스타일이 있어 이를 받아들이기만 하면 되었다. 칼 자세는 "가장 눈에 띄는 액션"이라며 시현류를 사용했다. 이소룡은 자신의 액션에 대해 감독에게 많은 요구를 했으며, 감독보다 이소룡의 의견이 더 강하게 반영되었다고 한다. 이소룡과 나유 감독의 사이가 좋지 않았다는 소문이 있었지만, 하시모토는 직접적인 갈등 장면은 보지 못했다고 말했다.

클라이맥스 액션 장면 촬영에는 꼬박 이틀이 걸렸다. 오후 1시부터 다음 날 오전 11시까지 세트장에 있어야 했고, 밖으로 나올 수 있는 시간은 저녁 식사 시간 1시간뿐이었다. 촬영 중 이소룡의 펀치나 킥이 잘못 맞는 일은 한 번도 없었다고 한다. 하시모토가 연기한 스즈키가 이소룡의 발차기에 날아가는 장면은 성룡이 스턴트 대역을 맡았다. 하시모토는 이 사실을 몰랐으나, 훗날 성룡 영화가 일본에서 개봉했을 때 딸이 이를 알려주며 "아빠 그렇게 대단했어?"라고 말했다고 한다.

홍콩 체류 기간은 약 2주였으며, 출연료는 가츠 프로덕션에서 지급되었다. 하시모토는 이 영화를 이소룡 사후 일본에서 개봉했을 때 처음 봤다고 하며, "홍콩에서는 인기 있었지만 일본에서 상영될 줄은 몰랐다"고 말했다.

3. 3. 배우로서의 에피소드

1959년 (쇼와 34년), 부상으로 2군으로 내려갔을 때, 고미 야스스케 원작 소설 『잇토사이 넘버 6』이 구단의 모회사인 다이에이에서 스가와라 켄지 주연, 키무라 케이고 감독으로 영화화되었다. 당시 2군에 있던 하시모토는 이 영화에 어드바이저 겸 선수 역으로 출연하며 실질적인 배우 데뷔를 했다. 그러나 이 영화 촬영 중 외야에서 다이빙 캐치를 연기하다가 쇄골이 부러지는 부상을 당했고, 결국 그 해 시즌 종료 후 자유 계약으로 풀려나 현역에서 은퇴했다.

이를 안타깝게 여긴 다이에이 본사의 의향으로, 『잇토사이 넘버 6』의 조감독이었고 같은 다이에이 사택에 살던 나카무라 다이지로로부터 "배우가 되지 않겠나"라는 권유를 받아 배우로 전향하게 되었다. 하시모토 본인에 따르면, 이 이야기는 바로 촬영소장을 거쳐 다이에이 사장 나가타 마사카즈에게 전달되어 순조롭게 결정되었다고 한다.

1960년 (쇼와 35년) 1월 1일, 하시모토는 "다이에이 뉴 페이스"로 정식 입사 발표를 했다. 동기로는 이타미 주조, 무라카미 후지오 등이 있었다. 이후 다이에이 교토 촬영소 전속 배우가 되어 주로 악역 중심의 단역을 맡았다.

1966년 (쇼와 41년), 큰 키를 살려 영화 『대마신』에서 대마신의 슈트 액터를 맡게 되었다. 같은 해 총 3편이 제작된 "대마신 시리즈" 모두에서 대마신 역을 연기했다. 이 캐스팅에는 시리즈 감독인 야스다 구미나 모리 이쓰오, 특수 촬영 감독 쿠로다 요시유키 등이 야구 팬이었던 점도 영향을 미쳤을 것이라고 하시모토는 회고했다. 그는 이 작품 직전에 출연했던 TV 시대극 『풍운아 한지로』(도쿄 12채널)에서 야스다 감독의 눈에 들었던 것 같다며, "어쨌든 슈트 액터는 체력이 필요했고, 대마신에게는 눈빛의 강렬함이 요구되었기 때문"이라고 말했다.

『대마신』 출연 제의를 받았을 때, 회사로부터 "교토에서 주역을 맡으라"는 말을 듣고 "주역이라니 고맙지만, 가츠 신타로나 이치카와 라이조를 제치고 할 역할이 뭘까"라며 반신반의하며 교토로 향했다고 한다. 그는 "가보니 확실히 주역이었다"고 웃으며 말했다.

대마신의 봉제 인형은 높이 2.5m, 무게 5.6kg에 달했고, 교토의 더운 날씨 속에서 촬영은 고생의 연속이었다. 특히 대마신의 눈은 가면 너머로 하시모토의 실제 눈을 보이게 한 것인데, 이는 "가짜 눈으로는 박력이 나오지 않는다"는 쿠로다 요시유키 특수 촬영 감독의 아이디어였다. 이 때문에 "신이니까 눈을 깜빡이지 말아 달라"는 요구를 받았고, 고구마 가루가 날리는 촬영 현장에서도 절대 눈을 깜빡이지 않으려 노력했다. 본인은 매우 힘들었다고 술회했지만, 힘주어 눈을 부릅뜨고 연기한 결과, 충혈되고 번뜩이는 눈빛 연기는 국내외에서 큰 호평을 받았다. 그는 "뜻밖의 행운이었다, 눈의 효과라는 것은"이라고 말했다. 이 때문에 눈이 상해서 차로 씻으며 관리했다고 한다.

대마신의 얼굴은 청록색이었기 때문에, 하시모토의 눈 주위도 같은 색으로 칠해야 했다. 그는 "슈트를 입고 있을 때는 괜찮은데, 벗고 쉴 때는 너구리 같은 얼굴이 되었다"고 말하며, 미스미 겐지 감독에게 "너구리 아저씨, 초록 너구리"라고 불렸다고 한다.

시리즈 2, 3편인 『대마신 노하다』, 『대마신 역습』에서는 수중 연기가 있었는데, 마신의 가면은 얼굴에 밀착되어 산소 공급 장치를 달 공간이 없어 산소통 없이 연기해야 했다. 슈트 액터로서 위험도 많고 당황스러운 일도 있었지만, 두 번째 작품부터 요령이 생겼고, 이후 1968년 (쇼와 43년) 영화 『요괴 대전쟁』에서 요괴 "다이몬" 역을 맡았을 때는 스스로 아이디어를 내는 등 매우 즐겁게 연기했다고 한다. 다이몬 역에 하시모토를 발탁한 것은 쿠로다 요시유키로, 대마신에서 보여준 눈빛의 박력을 높이 사 그를 강력히 추천했다. 하시모토는 "이건 이제 장인의 일이라, 출연료 같은 건 별로 상관없고, 우리는 이걸 만들어서 만족한다, 같은 느낌으로 했다"고 이야기했다.

1971년 (쇼와 46년), 다이에이가 도산하자 카츠 신타로의 "카츠 프로덕션"으로 이적했다. 1972년 (쇼와 47년)에는 홍콩 영화 『정무문』에서 이소룡의 상대역으로 출연하는 등, 이후 여러 영화에 출연했다.

다이에이 교토 촬영소 시절, 하시모토는 카츠 신타로에게 귀여움을 받아 "카츠 일가"로 불리는 그룹의 일원이었다. 다이에이 교토의 『악명』 시리즈 중 『악명 시장』(모리 이세이 감독)에서 바텐더 역으로 타미야 지로에게 맞는 장면을 찍은 후, 가츠에게 특히 마음에 들었다고 한다. 다이에이 도산 후에도 가츠의 권유로 "카츠 프로"에 소속되었다. 하시모토는 가츠에 대해 "항상 자신의 주위에 친한 사람들을 두고 싶어 하는 사람이다. 역시 스타 특유의 성격이랄까. 우리는 잘 알았다. 나는 정말 귀여움 받았다"고 말했다.

가츠의 검술에 대해서는 "라이조 씨(이치카와 라이조)의 검술은 찌릿찌릿한 느낌. 칼을 들이대면 으, 저리는 듯한. 가츠 씨는, 아무튼 닥치는 대로 몸으로 덤벼드는 느낌"이라고 평가했다. 나가타 마사카즈와 마찬가지로 가츠 역시 영화 제작에 어려움을 겪었는데, 하시모토는 "그러니까 그 아저씨(가츠 신타로)가 좀 더 제대로 해줬으면, 우리도 좀 더 다른 곳으로 갔을지도 모른다. 바지 속에 이상한 거 넣지 말고"라고 웃으며 말했다.

1985년 (쇼와 60년), 나가타 마사카즈의 사망을 계기로 배우 활동을 은퇴했다. 은퇴 후에도 "대마신 시리즈" 관련 이벤트나 특별 프로그램에 게스트로 출연하기도 했다. 2017년 (헤이세이 29년) 10월 11일 폐암으로 사망했다[6].

3. 4. 《대마신》, 《요괴 대전쟁》 관련

하시모토 치카라는 영화 《대마신》(1966년)에서 주인공 '대마신' 역을 맡았다. 이 캐스팅에는 당시 시리즈 감독이었던 야스다 구미나 모리 이쓰오, 특수 촬영 감독 쿠로다 요시유키 등이 야구 팬이었던 점이 영향을 미쳤을 수 있다는 이야기가 있다. 하시모토 본인은 《대마신》 출연 직전에 출연했던 텔레비전 시대극 《풍운아 한지로》(당시 도쿄 12채널)에서 야스다 감독의 눈에 들었던 것 같다고 회상하며, 슈트 액터에게 요구되는 체력과 대마신 캐릭터에 필요한 강렬한 눈빛이 캐스팅의 이유였을 것이라고 말했다.

《대마신》 출연 제의를 받았을 때, 소속사로부터 "교토에서 주역을 맡으라"는 말을 듣고 처음에는 반신반의했다고 한다. 당대 최고의 스타였던 가츠 신타로나 이치카와 라이조를 제치고 자신이 맡을 주역이 무엇일지 의아해하며 교토로 향했지만, 도착해보니 정말 주역이었다며 웃었다.

대마신 슈트는 높이 2.5m, 무게 5.6kg에 달했으며, 더운 교토의 날씨 속에서 촬영은 매우 힘들었다고 한다. 특히 대마신의 눈은 가면 밖으로 하시모토의 실제 눈을 노출시키는 방식이었는데, 이는 "가짜 눈으로는 박력이 나오지 않는다"는 특수 촬영 감독 쿠로다 요시유키의 생각 때문이었다. 이 때문에 하시모토는 "신이니까 눈을 깜빡이지 말아 달라"는 요구를 받았고, 촬영 중 고구마 가루가 날리는 상황에서도 눈을 깜빡이지 않으려 애썼다. 본인은 매우 힘들었다고 술회했지만, 눈에 힘을 주고 부릅뜬 연기는 결국 충혈되고 번뜩이는 강렬한 눈빛으로 표현되어 국내외에서 큰 호평을 받았다. 그는 "눈 연기의 효과가 예상외로 컸다"고 회고했으며, 촬영 후에는 눈이 거칠어져 차로 씻어 관리했다고 한다.

대마신의 얼굴은 청록색이었기 때문에 하시모토의 눈 주위도 같은 색으로 칠해야 했다. 그는 "슈트를 입고 있을 때는 괜찮지만, 벗고 쉴 때는 너구리 같은 얼굴이 되었다"고 말하며, 당시 미스미 겐지 감독에게 "너구리 아저씨, 초록 너구리"라고 불렸던 일화를 전했다.

이후 제작된 시리즈 2편 《대마신 노하다》와 3편 《대마신 역습》에서는 수중 연기 장면이 있었는데, 마신 가면이 얼굴에 밀착되어 산소 공급 장치를 부착할 공간이 없어 산소통 없이 연기해야 했다. 슈트 액터로서 위험한 상황도 많았지만, 두 번째 작품부터 요령이 생겼다고 한다.

그 후 《요괴 대전쟁》(1968년)에서는 요괴 '다이몬' 역을 맡았다. 이 역할 역시 《대마신》에서 보여준 하시모토의 강렬한 눈빛 연기를 높이 산 쿠로다 요시유키 감독의 강력한 추천으로 캐스팅되었다. 하시모토는 다이몬 역을 연기하며 직접 아이디어를 내는 등 매우 즐겁게 작업했다고 회상했다. 그는 "이것은 이제 장인의 일이라, 출연료 같은 것은 크게 상관없고, 우리가 이걸 만들어서 만족한다는 느낌으로 임했다"고 당시의 마음가짐을 이야기했다.

3. 5. 카츠 신타로 관련

다이에이 교토 촬영소 시절 카츠 신타로에게 특히 귀여움을 받아, 소위 "카츠 일가"로 불리는 그룹의 일원이었다. 다이에이 교토에서 제작한 『악명』 시리즈 중 하나인 『악명 시장』(모리 이세이 감독) 촬영 당시, 바텐더 역으로 출연하여 타미야 지로에게 맞는 장면이 있었는데, 이 일을 계기로 카츠 신타로의 눈에 들었다고 한다. 1971년 다이에이가 도산한 후에는 카츠 신타로의 권유로 그의 회사인 카츠 프로덕션으로 이적했다.

하시모토는 카츠 신타로에 대해 "항상 자신의 주위에 친한 사람들을 두고 싶어 하는 사람이다. 스타 특유의 성격이라고 할까. 우리는 잘 알았다. 나는 정말 귀여움을 받았다"고 회고했다.

카츠 신타로의 검술 스타일에 대해서는 "라이조 씨의 검술은 찌릿찌릿한 느낌이다. 칼을 들이대면 저리는 듯한 느낌이다. 카츠 씨는 그저 닥치는 대로 몸으로 부딪히는 느낌"이라고 비교하며 평가했다. 또한, 나가타 마사카즈와 마찬가지로 카츠 신타로 역시 영화 제작 과정에서 여러 어려움을 겪었던 점을 언급하며, "그 아저씨(카츠 신타로)가 좀 더 제대로 했다면, 우리도 좀 더 다른 길을 갔을지도 모른다. 바지 속에 이상한 것을 넣지 않았다면 말이다"라며 웃음과 함께 그의 사생활 문제를 간접적으로 비판하기도 했다.

3. 6. 《정무문》 관련

1972년 홍콩 영화 《정무문》에서 최종 보스인 스즈키 히로시 역을 맡아 이소룡과 공연했다.

하시모토가 이소룡과 함께 출연하게 된 계기는 가츠 신타로가 영화 《신 좌두사 파! 당인검》(1971년)에서 왕우(지미 왕)와 함께 출연하며 친분을 쌓은 것에서 시작되었다. 왕우는 골든 하베스트를 통해 가츠에게 "미국에서 온 대단한 배우(이소룡)가 홍콩에서 찍은 첫 영화가 100만 달러 흥행을 기록했다. 그의 두 번째 영화를 제작하려는데, 메이지 시대의 악역 일본인을 연기할 배우를 소개해 달라"고 요청했다.

가츠는 이 요청을 받아들여 하시모토에게 갑자기 전화해 "지금부터 마작 할 테니 3만 가지고 당장 와라"고 말했다. 하시모토는 마작 제안으로 생각했지만, 3만의 의미를 몰랐다. 그러나 가츠의 제안이라 거절하지 못하고 찾아가자, 가츠는 "사실 홍콩에 가줬으면 좋겠다"고 밝혔고, 전화로 들은 3만은 여비였다. 하시모토는 놀랐지만, 가츠의 더빙을 담당하던 가츠무라 준과 함께 홍콩으로 떠났다. 그는 광둥어도 모르고 사전 지식도 없는 상태였다.

홍콩에 도착하자 "하시모토 치카라, 가츠무라 준 대선생 환영"이라는 깃발이 있었고, 과거 다이에이 조후 촬영소에서 일본 영화를 배우던 조감독이 마중 나와 통역과 체류 기간 동안의 보살핌을 맡아주었다. 이후 촬영소에서 나유 감독을 만났고, 하시모토는 그를 "스케일이 큰 거물"이라고 생각했다.

주연 배우 이소룡은 하시모토를 매우 환영했으며, 하시모토는 그를 "굉장히 민첩하고 쾌활하며 예의 바른 사람"으로 기억했다. 영화 촬영은 홍콩 영화계의 관행대로 각본 없이 진행되었으며, 하시모토는 "어쨌든 악역이다. 너는 이소룡 역할의 원수다"라는 지시만 받았다. 대사 역시 통역에게 들은 내용을 바탕으로 스스로 일본어로 만들어 사용했으며, 영화의 전체 내용은 파악하지 못했다.

영화 속 일본인들이 하카마를 앞뒤로 거꾸로 입고 있는 장면에 대해 하시모토가 지적했지만, 의상 담당자는 "이쪽이 더 보기 좋다"며 수정하지 않았다. 안경을 쓴 유도 선생 역할의 배우는 메이지 대학 출신으로 일본어를 구사할 수 있었다고 한다.

이소룡과의 액션 장면 촬영 시, 하시모토 측의 검술 안무는 가츠무라 준이 담당했고, 이소룡은 자신만의 스타일로 액션을 구성했다. 하시모토는 이를 받아들이기만 하면 되어 특별히 어려움은 없었다고 한다. 칼을 다루는 자세는 가장 눈에 띄는 액션을 위해 시현류를 사용했다. 이소룡은 자신의 액션에 대해 감독에게 적극적으로 의견을 제시했으며, 감독보다 그의 주장이 더 강하게 반영되었다고 한다. 이소룡과 나유 감독의 사이가 좋지 않다는 소문도 있었지만, 하시모토는 직접적인 충돌을 목격하지는 못했다고 전했다.

클라이맥스 액션 장면 촬영에는 꼬박 이틀이 소요되었으며, 오후 1시부터 새벽 11시까지 세트장에 머물러야 했다. 이소룡의 펀치나 킥이 실수로 맞는 일은 한 번도 없었다고 한다. 영화에서 스즈키(하시모토)가 이소룡의 발차기에 맞아 날아가는 장면은 성룡이 스턴트 대역을 맡았다. 하시모토는 이 사실을 몰랐으나, 훗날 성룡의 영화가 일본에서 개봉했을 때 딸을 통해 알게 되었다고 한다.

홍콩에서의 촬영 기간은 약 2주였으며, 출연료는 가츠 프로덕션에서 지급받았다. 하시모토는 이소룡이 사망한 후 《정무문》이 일본에서 개봉했을 때 비로소 영화를 처음 보았으며, "홍콩에서는 인기가 있었지만 일본에서 상영될 줄은 몰랐다"고 회상했다.

4. 출연 작품

하시모토 치카라는 1959년 영화계에 입문하여 야구 선수 은퇴 후 본격적인 배우 활동을 시작했다. 주로 다이에이 영화 소속으로 1960년대부터 1980년대까지 활동하며 다양한 영화에 출연했다. 특히 특촬물과 액션 장르에서 인상적인 연기를 선보였으며, 슈트 액터로서도 활약했다. 그의 주요 출연 작품 목록과 상세 내용은 하위 섹션에서 다룬다.

4. 1. 영화

야구 선수에서 영화 배우로 전향한 하시모토지만, 당시 야마모토 후지코, 쿄 마치코, 와카오 아야코 등이 전성기를 구가하고 있어서 "그런 사람들과 함께 영화에 출연한다는 것은 생각할 수 없었다"고 말했다. 하지만 우에다 키치지로에게 상담한 결과, "당신은 그 얼굴 생김새도 성격도 (배우에게) 어울린다"라는 조언을 듣고, "같은 다이에이 영화라서 사택을 이사하지 않아도 된다"는 점도 있어서 배우 전향을 결심했다고 한다. 야구 선수 시절에는 월급 10만(연봉 120만)이었지만, 다이에이에서 제시된 급료는 연봉 30만이었다. 처음에는 "급료가 30만 엔이다"라고 회사에서 제시받고, "월급이 30만 엔이 되었나"라며 기뻐했지만, "연봉이 30만 엔"이라고 듣고 실망했다고 한다.

데뷔작은 "엑스트라" 중 한 명으로, 카바레에서 춤을 추는 남녀 중 한 명이었다. 가츠 신타로나 이치카와 라이조, 타미야 지로 등과 공연했는데, 이들 스타에 대해 "각각 완전히 한 나라의 주인이니까, 예를 들면 오다 노부나가, 도쿠가와 이에야스, 도요토미 히데요시 같은 각기 다른 타입의 영웅들이에요"라고 말했다. 베임을 당하는 배역도 많았지만, 검술은 특별히 남에게 배운 적 없이, 보고 흉내 내는 식으로 익혔다고 한다.

배우를 은퇴한 계기로, "나를 키워준 나가타 마사이치 씨가 돌아가신 것이 매우 컸다"고 하며, 나가타에 대해 "결과는 좋지 않았지만, 그전까지 그 사람이 영화계나 회사에 쏟은 업적은 대단한 것이었어요"라고 회상했다.
주요 출연작

연도제목배역비고
1959년일도제선수데뷔작, 야구 어드바이저 겸임
1960년세 명의 건달 ('Sannin no kaoyaku'')
멋진 녀석 (Sutekina yaro)
긴자의 도라 고양이 (Ginza no dora-neko)
1961년긴자코 이야기 (Ginzakko monogatari)
아내는 고백한다 (Tsuma wa kokuhaku suru)
1962년살인 고래 (고래신)수염
칼에 건다 (Ken ni kakeru)
지옥의 자객 (Jigoku no shikyaku)
1963년밤의 배당 (Yoru no haitô)블루칼라
거인 오쿠마 시게노부 (Kyojin Ôkuma Shigenobu)
악명 시장야쿠자
1964년검은 비장의 카드 (Kuro no kirifuda)
자토이치, 싸우다 (좌두시 혈소여행)이노조
무숙자 (Mushuku mono)비샤몬크레딧 미기재
1965년네무리 쿄시로: 마쇼켄 (잠자는 광사로 마성검)
복수의 어금니 (Fukushû no kiba)쿠라야미의 부하
구름을 부르는 행동관 (Kumo o yobu kôdôkan)
1966년대마신 (Daimajin)모토키 한조, 대마신2역, 대마신 역은 크레딧 미기재
대마신 이카루 (대마신 노하다)이케나가 슌페이, 대마신2역
대마신의 분노 (대마신 역습)대마신
곤타쿠레 (Gontakure)항만 감독관
도둑 번호
육군 나카노 학교헌병 소령 대마신
신·병대 야쿠자일본 병사
1967년어떤 살인자 (A Certain Killer)
찢어진 성의
여도박장
1968년가메라 대 바이러스닥터 A / 의사풍의 남자
괴담 우물 (괴담 함정)우데가와
속 히로쿠 여자로 (Zoku hiroku onna ro)감찰관
요괴 대전쟁 (Yokai Monsters: Spook Warfare)다이몬
제트 F104 탈출하라사사이 2등 공위
1969년신 요타로 전기병장 하시모토
영 파워·시리즈 신주쿠 번외지
아아 해군
아아 육군 매 전투대
사사부키 오몬
1970년야쿠자 절창 (Yakuza Zessyō)토야마 (야쿠자)
겐카이 유협전 파레카부레갓파의 고로
괴담 누이가 연못
몰살의 스캣
모나 리자 오쿄 (Mona Riza okyo)
1971년자토이치와 외팔 검객 (신 좌두시·깨져라! 당인검)사무라이 / 무사
남자 한 마리 꼬마 대장범인 1
1972년정무문 (Fist of Fury)스즈키 히로시일본 공개는 1974년
신 병대 야쿠자: 가센 (Shin heitai yakuza: Kasen)
무숙인 미코가미의 죠키치 어금니는 찢었다
1986년복성 (Twinkle, Twinkle, Lucky Stars)일본인 격투가최종 출연작
1992년이소룡과 쿵후 매니아본인다큐멘터리


'대마신' 시리즈『대마신』에서 대마신 역을 맡았는데, 시리즈 감독 야스다 구미나 모리 이쓰오, 특수 촬영 감독 쿠로다 요시유키 등이 야구 팬이었던 것이 이 배역에 영향을 미친 것 아니냐고 이야기했다. 마침 이 작품 전에 텔레비전 시대극 『풍운아 한지로』(도쿄 12채널)에 출연하고 있었는데, "야스다 감독에게 이때 마음에 들었던 거겠죠. 아무튼 봉제 인형에는 체력이 필요했고, 대마신에게는 눈의 강렬함이 요구되었으니까요"라고 말했다.

『대마신』에서는 회사에서 "너, 교토에서 주역 맡아"라는 말을 듣고, "주역이라고 하니 고맙지만, 가츠 신타로나 이치카와 라이조를 제쳐두고 할 역할이라니 뭘까"라며 반신반의하며 교토로 향했다고 한다. "가보니 확실히 주역이었습니다"라고 웃으며 말했다.

대마신의 봉제 인형은 높이 2.5m, 무게 5.6kg으로, 교토의 더운 기후에서 고생의 연속이었다고 한다. 또한, 대마신은 하시모토의 눈을 가면에서 들여다보게 한 것이었는데, 이는 쿠로다 요시유키 특수 촬영 감독의 "가짜 눈으로는 박력이 나오지 않는다"는 생각에 따른 것이다. 이 때문에 "신이기 때문에 눈을 깜빡이지 말아 주세요"라는 말을 듣고, 고구마 가루가 날리는 촬영 현장에서도 절대 눈을 깜빡이지 않았다. 본인은 꽤 힘들었다고 이야기하지만, 힘을 주어 눈을 부릅뜨고 연기했다고 한다. 그 결과, 충혈되고 번뜩이는 눈의 연기가 안팎으로 큰 호평을 받았다. "뜻밖의 행운이네, 눈의 효과라는 것은"이라고 말했다. 이 때문에 눈이 거칠어져서, 차로 씻어 관리했다고 한다.

대마신의 얼굴은 청록색이어서, 하시모토의 눈 주위도 이에 맞춰 색을 칠했다. "봉제 인형을 입고 있을 때는 괜찮은데, 벗고 쉴 때는 너구리 같은 얼굴이 되었다"고 말하며, 미스미 겐지 감독에게서 "너구리 아저씨, 초록 너구리"라고 불렸다고 한다.

2·3편인 『대마신 노하다』, 『대마신 역습』에서는 수중 연기가 있는데, 마신의 가면은 얼굴에 밀착되어 있어 장치를 할 여지가 없어 산소통 없이 연기했다. 봉제 인형 의상을 입은 슈트 액터로서 위험도 많고 당황하기도 했지만, 두 번째 작품인 『대마신 노하다』부터 요령이 생겨서, 그 후 『요괴 대전쟁』에서의 요괴 "다이몬" 역에서는 스스로 아이디어를 내는 등 매우 즐겁게 연기했다고 한다. 다이몬 역에 하시모토를 발탁한 것은 쿠로다 요시유키로, 대마신에서의 눈의 박력을 높이 사 간절한 지명을 받아 기용되었다. "이건 이제 장인의 일이라, 출연료 같은 건 별로 상관없고, 우리는 이걸 만들어서 만족한다, 같은 느낌으로 했습니다"라고 이야기했다.
'정무문' 출연정무문』에서 이소룡과 함께 출연하게 된 계기는, 가츠 신타로가 『신 좌두사 파! 당인검』(1971년, 야스다 구미 감독)에서 왕우와 함께 출연한 것이었다. 가츠가 왕우와 친해져, 왕우가 골든 하베스트를 통해 "이번에 미국에서 온 굉장한 녀석이 홍콩에서 찍은 첫 영화가 100만달러의 흥행 수입을 올렸다. 그 2탄을 만들고 싶은데, 메이지 시대의 나쁜 일본인 역을 할 배우를 소개해 달라"고 가츠에게 의뢰했다.

이를 받아들인 가츠로부터 갑자기 전화로 "야, 지금부터 마작 할 테니 3만 가지고 당장 와"라는 연락을 받은 하시모토는, 마작 제안인 줄 알았지만 3만 엔의 의미를 몰랐다. 하지만 가츠의 제안이라 거절할 수 없어 가보니, "야, 사실 홍콩에 갔으면 좋겠어"라는 말을 들었다. 전화로 들은 3만은 여비였다. 하시모토는 놀랐지만, 그대로 가츠의 롱 컷 더빙을 담당하고 있던 가츠무라 준과 2명이서 홍콩으로 향했다. 광둥어도 못하고, 사전 지식도 없는 상태로 떠났다고 한다.

불안한 마음으로 홍콩에 도착하니, "하시모토 치카라, 가츠무라 준 대선생 환영"이라고 적힌 깃발이 서 있었고, 다이에이 조후 촬영소 시절에 일본 영화를 배우기 위해 조감독을 했던 사람이 마중 나왔다. 이 사람이 체류하는 동안 통역 겸 보살핌을 맡아줘서 조금 안심할 수 있었다고 한다. 다음에 촬영소에서 나유 감독을 만났는데, "스케일이 큰 거물이구나 생각했다"고 한다.

다음으로 주연 이소룡을 만났는데, 매우 환영해 주었다고 한다. 그 인상으로 "굉장히 민첩한 느낌. 매우 쾌활한 느낌의 예의 바른 사람이었다"고 말했다. 영화 자체는 홍콩 영화의 통례로 각본도 대본도 없이, "어쨌든 악역이다, 너는 이소룡이 하는 역할의 원수! 원수! 원수의 인간이다"라는 지도밖에 없었다. 대사도 앞서 말한 통역으로부터 들은 내용을 스스로 일본어로 끼워 맞췄다고 하며, 영화 내용은 전혀 파악하지 못했다.

이 영화에서는 일본인이 하카마를 앞뒤 거꾸로 입고 있는데, 하시모토가 이를 지적해도 의상 담당자가 "이쪽이 더 좋으니까"라며 밀어붙였다. 악역으로 안경을 쓴 유도 선생은 메이지 대학 출신으로, 일본어를 구사했다고 한다.

이소룡과의 액션 장면에서는, 하시모토 측은 가츠무라가 검술을 짜고, 이소룡 쪽은 자신만의 형식이 있어서 그것을 받아들이기만 하면 되므로 특별히 고생하지 않았다고 한다. 칼의 자세는 "가장 눈에 띄는 액션"이라며 시현류를 사용하고 있다. 이소룡은 자신의 액션에 관해서 꽤 감독에게 주문을 넣었고, 감독보다 이소룡의 주장이 더 강했다고 한다. 이소룡과 나유는 사이가 안 좋았다고 하는데, 하시모토는 특히 두 사람의 싸움은 보지 못했다고 한다.

촬영에서는 클라이맥스의 액션 장면만으로 꼬박 이틀이 걸렸다. 오후 1시부터 새벽 11시까지 세트에 갇혀 있었고, 밖에 나올 수 있었던 것은 저녁 1시간, 식사 시간뿐이었다. 이소룡의 펀치나 킥이 잘못 맞은 적은 한 번도 없었다고 한다. 스즈키(하시모토)가 이소룡의 발차기에 날아가는 장면은 성룡이 스턴트 대역을 했다고 한다. 하시모토는 이것을 몰랐지만, 후년에 성룡의 영화가 일본에서 개봉되었을 때 딸이 이것을 알고 "아빠 그렇게 대단했어"라고 알려주었다고 한다.

촬영에서의 홍콩 체류 기간은 2주 정도였으며, 개런티는 가츠 프로에서 지불되었다. 영화 자체는 이소룡이 사망한 후 일본에서 공개되었을 때 처음 봤다고 하며, "홍콩에서는 인기 있지만 일본에서 할 줄은 생각 못했습니다"라고 한다.

5. 사망

2017년 10월 11일 폐암으로 사망했다.[6]

참조

[1] 뉴스 橋本力さん死去 元プロ野球選手の俳優、ブルース・リーと共演、大魔神のスーツアクターも http://www.sankei.co[...] 2017-10-19
[2] 뉴스 大魔神の目にこだわり https://mainichi.jp/[...] 2017-04-21
[3] 서적 Godzilla on my Mind: Fifty Years of the King of Monsters St. Martin's Press
[4] 웹사이트 俳優の橋本力が死去、「大魔神」スーツアクターや「ドラゴン怒りの鉄拳」敵役 https://natalie.mu/e[...] 2021-10-01
[5] 문서 OKエンターテイメントのプロフィールでは「はしもと りき」の読みで紹介されている。
[6] 뉴스 俳優の橋本力が死去、「大魔神」スーツアクターや「ドラゴン怒りの鉄拳」敵役 https://natalie.mu/e[...] 2017-10-19



본 사이트는 AI가 위키백과와 뉴스 기사,정부 간행물,학술 논문등을 바탕으로 정보를 가공하여 제공하는 백과사전형 서비스입니다.
모든 문서는 AI에 의해 자동 생성되며, CC BY-SA 4.0 라이선스에 따라 이용할 수 있습니다.
하지만, 위키백과나 뉴스 기사 자체에 오류, 부정확한 정보, 또는 가짜 뉴스가 포함될 수 있으며, AI는 이러한 내용을 완벽하게 걸러내지 못할 수 있습니다.
따라서 제공되는 정보에 일부 오류나 편향이 있을 수 있으므로, 중요한 정보는 반드시 다른 출처를 통해 교차 검증하시기 바랍니다.

문의하기 : help@durumis.com